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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유래

연 혁

영암군의 2 읍 9 면 중의 하나로 군의 중앙에 위치하며 동쪽과 북쪽은 신북면이고 남쪽은 덕진면과 영산강을 건너의 군서면이고 서쪽은 시종면과 접경을 이루고 있다. 행정구역개편(1914년) 이전에는 영암면의 북쪽에 있다하여 북일종면(北一終面)이라 하여 원목점(元木店)등 56 마을을 관할 하다가 1914년 4월 1일 일제(日帝) 시·군·면 통폐합에 따라 나주군(羅州郡) 종남면(終南面)의 인덕(仁德)등 6 마을과 북이시면(北二始面)의 태산(泰山), 중명(中命)의 일부를 병합하여 원항(元項), 덕화(德化), 봉호(鳳湖), 도포(都浦), 구학(九鶴), 영호(永湖), 성산(聖山), 수산(水山)의 법정리를 관할하였고 1932년 면의 명칭을 도포면으로 개칭(改稱)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영산강 농업개발로 도포리, 원항리가 해변이었으나 바다는 없어지고 해수면의 많은 면적이 농토로 바뀌었다.

마을 유래

도포면 마을 유래 - 법정리, 유래 제공 표
법정리 유래
원항리 본래 영암군 북일종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원목점, 항동, 원목리 일부와 종남편의 가척리 일부를 병합하여 원목과 항동의 이름을 따서 원항리라 하였음. 현풍 곽씨 곽호인이 시조 곽경의 18세손인 서기 1535년에 해남 계곡에서 곽세웅의 장자로 태어나 부모를 모시다가 서기 1555년 경 해남 달량포에 왜변이 일어나자 형제들과 각각 흩어져 이곳을 와서 보고 정세가 좋아 앞으로 백대를 지킬 수 있는 터라 생각하고 숙부인 진주 강씨와 함께 원목에 정착하였음.
봉호리 본래 영암군 북일종면의 지역으로서 둠벙이 있어 둠벙개, 봉개, 붕개 또는 봉호정, 봉호정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송죽정, 태산리, 망교리, 신호정, 신흥리, 기동리, 원목리와 북이시면 태산리, 중명리의 각 일부와 종남면, 신리기, 가척리 일부를 병합하여 봉호리라 하였음. 고려말 공민왕 때의 문하시랑 양석재가 고려가 망하자 조선조에 불복하여 살았는데 석재의 3손 양홍효가 나주군 다시면 사랑굴에서 1450년 경 봉호정에 이거하여 정착하였으며 그 후 양흥효의 후손이 송죽정, 태산으로 이거하여 약 20대에 이르고 있음.
덕화리 본래 영암군 북일종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완화리와 종남면의 인덕리, 학림리, 금호리를 병합하여 인덕과 완화의 이름을 따서 덕화리라 하였음. 광산 김씨 낙남조 김대연이 광주서 1동에 살다가 구산을 하노라고 신안 이승을 데리고 각처로 다니다가 완화 뒷산에 이르러 산 아래에 구유돌이라는 마을을 두고 마을 이름을 구유월이라하고 기산 세장지를 삼으면 천년을 두고 번영리라 생각하여 이주하여 왔다.
도포리 본래 영암군 종남면의 지역으로 도싯개, 도삿개, 또는 도시포, 도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나포리를 병합하여 도포리라 하였으며, 포구로 크게 번창하였음. 1638년초 나주 땅에 살던 김해 김씨 김한수, 여산 송씨 송근룡, 경주 최씨 최삼지 세사람이 당시 무인도였던 도포에 상륙하여 정주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주로 바다에 나가 고기잡이를 하며 생계를 꾸렸음.
영호리 본래 영암군 북일종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영평리, 부평리, 회호점, 도림리, 서재리, 운월리, 유춘리, 상포리를 병합하여 영평과 회호정의 이름을 따서 영호리라 하였다. 조선 숙종 때 광산김씨 김행귀가 충청도 연산에서 살다가 부친 김석찬이 유배되자 형제가 낙담하여 동래 정씨 부인을 맞아 정착하게 되었다.
구학리 본래 영암군 북일종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학송리, 목화리, 사랑곡, 후정리, 구정리, 용호리 동화점을 병합하여 구정과 학송의 이름을 따서 구학리라 하였는데, 도포면 소재지로 학교, 우체국, 파출소 등 관공서가 있음. 1580년 김해 김씨 김명대가 당시 병조판서를 지내고 귀향하여 고향인 영암군 삼호면 해리보다 더 좋은 마을터를 잡기 위해 이곳저곳을 다니다 이곳이 거북이 형국에 영산강이 흐르고 있어, 후대 번영의 터라 여겨 정착하고 마을을 구정이라 정하였음.
수산리 조선조 성종 7년에 고령 박씨 박명환이 충청도에 살다가 호조참판의 벼슬을 하여 영암 땅으로 오게되어 아들인 박광수가 이 마을에 정착하고 살았는데 마을 앞 당산나무에 이상하게도 조석으로 참새 떼가 많이 날아들어 심할 때는 말소리를 알아 들을 수 없을 정도여서 마을 이름을 조감리라 불렀는데 그후 조(鳥)자를 조(早)자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음.
성산리 이조 중엽에 전주 이씨 경영군 제17대손 이군화가 당시 한성에서 당파 싸움에 몰려 남하하던 중 항서 다리에서 마을 뒷산을 바라보고 산의 수려함과 비옥한 평야, 선량한 주민들의 인심에 현혹되어 이곳에 정착하였으며 수구를 막고 후손의 영달을 위하여 각동 어구에 당산 소나무를 심어 보길 보전하기를 기원하며 이 마을에 살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