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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인물

양달사 약력

양달사 소개

양달사는 1518년 2월 2일, 전라도 영암 도포 봉호정에서 출생났다. 어려서부터 힘과 담력이 남달랐던 그는 일찍이 무과에 뜻을 두고 열심히 병법과 무예를 연마하여 19세인 중종 32년(1537년)에 급제하였다. 10여년 후인 명종 1년(1546년) 11월 10일 중시(重試)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둬 진해·해남현감 등을 지냈다. 공직에 몸담을 때는 항상 청렴하고 근검하였으며, 집에서는 형제들과 우애가 좋았다.
1553년 어머니(淸州韓氏) 상을 당해 고향에서 시묘살이를 하던 중 1555년 5월 11일 왜구가 영암 달량진(현 해남군 북평면 남창)에 침입했다. 5월 13일 벌어진 전투에서 절도사 원적(元績)과 장흥부사 한온(韓蘊)이 죽고, 영암군수 이덕견(李德堅)이 항복한 데 이어, 인근의 성들도 잇달아 함락되면서 서남해안은 끔찍한 전쟁터로 변했다. 머잖아 영암성을 공격해 오리라는 것을 직감한 양달사는 형제들과 함께 의병을 모집했다. 5월 24일 새벽에 왜구가 영암성을 포위했다는 소식에 은밀히 의병대를 이끌고 영암으로 이동한 양달사는 영암향교 뒷산에 매복하여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가 다음날 오전 미리 분장시킨 창우대(倡優隊, 남사당패)로 하여금 굿판을 벌이게 하여 왜구를 방심시킨 후, 일시에 급습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덕진다리까지 도망간 왜구들을 군더리 방죽(현 공설운동장) 진흙 밭으로 유인하여 참살하기도 하고, 관군과 함께 추격하여 잔당을 몰아내는 등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또한 양달사 의병장이 왜구에 포위된 영암성에 은밀히 들어가 병사들과 백성들이 기갈에 허덕이는 것을 보고 장독샘(將纛泉)을 파게 하여 사기를 진작시킨 일은 영암의 대표적인 전설이 되었다.
1555년 5월 25일, 왜구를 크게 물리치고 봉호정으로 돌아온 양달사는 전투 때 입은 부상으로 1557년 12월 20일 39세의 나이로 여생을 마쳤으며, 형 달수도 창독으로 1년 후 사망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양달사 이름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그들 형제의 공적은 여지도서와 호남읍지, 호남절의록 등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전라도 유림들의 건의로 1847년(헌종 13년) 10월 19일 양달사는 좌승지로, 형 달수는 사헌부 지평으로 추증되었다. 양달사 4형제의 묘는 현재 이곳 영암군 도포면 봉호정 입구 제주양씨 선산에 있으며, 묘지 앞에는 1974년 영암군수가 세운 순국비가 세워져 있다. 영암군에서는 2019년 8월 양달사 시묘유적과 영암읍 장독샘을 영암군 향토문화유산 제8호로 지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