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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의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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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 장군과 몽해 (서호면 몽해리)

영암에서 구림을 지나 학산 쪽으로 4km를 더 가면 서호면 화송리 화소가 나온다. 이 마을서 1.5km 거리로 바라보이는 곳에 몽해라는 마을이 있다. 옛날 이곳은 '九音坪' 또는 '꿈바다', '굼바대' 등으로 불렀다. 지금은 들이 되었지만 얼마전까지도 영암만 바닷물이 이곳까지 넘실거렸다. 이곳을 '꿈바다'라 부르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4백년 전 김완(金完) 장군(1577∼1635)이 태어난 전설 때문이다.

김완 장군은 김극조(1534∼1591)와 천안 전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천안 전씨는 김완을 임신할 때 영암만 바닷물이 그의 치마폭으로 몰려드는 꿈을 꾸었다. 이 때문에 꿈바다가 된 것이다.
화소는 지형 전설에 알맞게 마치 학이 알을 품고 있듯이 높이 3m, 넓이 10평 가량의 알섬 일곱 개가 마을 앞에 5백m 간격으로 있었으나 1973년 경지정리 때 다 없어지고 한 개만 남아 있다. 김완은 그의 나이 15살 때 아버지가 억울하게 옥사하는 일을 당했다.
그의 아버지 극조는 무과에 급제해 만호(萬戶)를 거쳐 광양 현감을 지낼 때 왜구의 침노가 있을 것을 예견하고 군인을 모병해 훈련을 시키다가 1590년 이성 현감으로 옮겨가 있었다. 그의 후임으로 광양 현감이 되어간 한덕수는 정여림 모반사건으로 동인의 이발 일당이 숙청당하자 서인에 아부하기 위해 김극조는 이발형제와 더불어 난을 일으키기 위해 광양에 군대를 모아 조련한 사실이 있다고 거짓 모함을 했다. 조정에서는 즉시 김극조를 가두고 모진 고문을 가했으나 사실과 다름이 판명되었다.

그러나 출옥 전인 1591년 3월 12일 옥사하고 말았다. 15세의 김완은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의 시신을 모시고 몽해에서 4km 거리의 서호면 엄길리에 이르렀다. 이 때 호랑이가 앞을 가로막고 호소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므로 호통을 쳐서 길을 비키라 했으나 듣지 않는지라 자세히 살핀즉 목에 사람의 뼈가 걸려 있었다. 김완이 입을 벌리고 뼈를 꺼내주었다. 고개를 숙여 감사의 뜻을 표하고 그의 옷자락을 물고 그를 인도하는지라 이상히 생각하면서 따라가 보았다. 20리를 북행해 매월리에 이르러, 주룡진을 내려다 보는 산에 올라 앞 발로 땅을 후비는 게 아닌가, 그곳에서 바라보니 명당이라 그의 아버지 시신을 모셨다. 오늘날 이 묘터를 갈용음수터라고 부르며 이 묘앞에 대리석 비석을 세웠는데 근래에 비석에 까맣게 끼어 있던 바위옷이 저절로 벗겨져 흰 빛을 내는지라 사람들이 金門에 길조가 비칠 징조라고들 한다.

김완은 정유재란 때 참전, 남원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1604년 검모포 만호로 있다가 31세 되던 당해 고향에 돌아와 3년을 시묘했다. 그는 시묘가 끝나자 다시 아버지 원수를 갚기로 작정하고 조정에 붙어 벼슬을 살던 한덕수를 찾아가 궁에서 말을 타고 나오는 것을 화살로 쏘았으나 실패하였다. 기록으로는 4일 만에 서울에 당도했다고 되어 있으나 전설로는 당시 영암 군수 조찬한과 저녁에 바둑을 두고 나가 축지법으로 몇 시간 만에 서울에 당도해 암살에 실패하고 그 날 밤 영암으로 되돌아와 집에서 자고 이튿날 아침 영암 군수를 만났기 때문에 죄가 없는 것이 판명되어 출옥했다고 전해 온다.

또 그는 어렸을 때 월출산 용암사에서 공부를 했는데 누님인 서희효의 처와 석벽에 맨 손으로 그림 그리기 시합을 한 것이 1972년 국보 제144호로 지정된 구정봉 7백m 밑에 있는 마애여래좌상이라고 전해 온다. 그러나 이 조각품은 김완의 작품이 아니라 신라 통일기나 고려 초 작품으로 잘못 전해진 이야기다. 물론 구림 뒷산의 성도 김완 장군과 관련지어 말하기도 하나 백제 때 산성이다.

김완은 뒤에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학성군에 봉해졌다. 전라우수사를 지냈으며 인조대왕이 생존영을 내려보냈고 죽은 뒤 신도비를 해남 계곡면 선진에 세웠으나 역적 날 자리에 세웠다는 말이 전해져 시종면 만수리로 옮겼다. 만수리는 신도비가 서고부터 악역이 침노하지 않는다는 말이 전해 온다. 이곳에 말무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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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 0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