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길거리

영암의전설

4차 메뉴 정의

별을 보고 점친 지몽 (군서면 서구림리)

영암 고을은 지형상 공원이 동자(童子)형이고 십리 거리의 농덕(農德)리 율산(栗山)이 밤을 즐기는 형국이라 한다.

영암은 월출산(月出山)이란 영산(靈山)이 있어도 부자나 정승은 내지 못하고 이름난 장군과 도선(道詵), 경보, 형미, 수미 등 대승과 최지몽 같은 신통스런 도인을 많이 배출했다.

최지몽(어릴 때 이름은 총진이다.)은 907년 최상흔의 아들로 태어나 987년에 죽은 인물이므로 도선이 죽고 9년 만에 태어난 셈이다. 최총진은 어려서부터 밤마다 별만 쳐다보고 혼자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다. 별귀신이 붙어서 미쳐 실성을 했다고 모두 이상히 여겼다. 그러나 낮이면 공부를 해서 남달리 총명한 재주로 선생과 선배들을 놀라게 했다. 그가 점점 커감에 따라 천문학에 정통했고 어려운 주역을 줄줄 외웠다. 점은 귀신 같았다.

왕건이 고려의 첫 번재 왕으로 태조가 되고 삼한을 통일할 큰 뜻을 품고 있는데 한 번은 이상한 꿈을 꾸었다. "해몽을 잘하는 자를 불러 들여라". 왕의 분부가 내려서 전라남도 땅에 유명한 역자가 있으니 사흘 안으로 올려 오도록 하라고 사자들을 보내었다. 사자들이 영암 최총진의 집에 도착하여 최총진의 거처를 물어보니 아침에 어디로 간단 말도 없이 나갔는데 밤이 새도록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는 집안 사람들의 대답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시각에 송도에 도착하여 수문장에게 왕의 명령을 받고 왔으니 왕께 알현케 해달라고 청했다.
수문장은 "시골뜨기 그대가 무슨 일로 상감을 배알하려 하느냐." 라고 시골 청년에게 희롱 삼아 물었다.
그는 "자로써 나이는 십팔세올시다. 상감마마께서 큰 꿈을 꾸시고 꼭 저한테 해몽을 하라시는 분부로 왔습니다."
말을 들은 수문장은 얼마 후 궁궐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더니 황급히 최 청년을 맞아들였다. 임금은 이상히 여겨 왜 이렇게 일찍 왔는냐고 물은 즉 최 청년은 실은 저를 부르신 것을 사흘 전에 별을 보고 알았다고 하니 임금은 놀랐다. 그럼 꿈을 해몽해 보라고 했다. 삼한을 통일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임금은 즉석에서 지몽이라 이름을 붙였다. 그 뒤로 왕은 항상 최지몽을 측근에 두고 떠나지 못하게 총애하였다. 후에 그 해몽대로 삼한을 통합해서 명실공히 왕중 왕이 되자 최지몽에게 궁중 고문의 높은 지위를 내렸다.

혜종 반란사건때도 정종이 왕위에 올라 왕규 일당의 역적을 숙청하고 최지몽의 공을 포창하여 말주사귀로 승진시키고 말고 은기를 상으로 내렸다. 그러나 광종왕 때 큰 실수를 했다. 왕이 귀법사에 행차했을 때 호종했다가 어전 연회에서 술을 과음한 뒤에 자기의 공과 재주를 과시하고 왕에게 실례의 언행을 했다. 왕이 노해서 지몽을 귀양 보낸 뒤에 십년 동안이나 등용치 않다가 경종 오년에 다시 불러서 대광내의를 시키고 동래 군후를 봉해서 식읍 일천호를 내렸다.

하루는 지몽이 별로 천기를 보고 또 반란의 징조를 예언했다. 왕은 최지몽을 믿고 엄밀한 경계를 취했다. 과연 왕숭등이 모반을 일으킨 것을 진압시키고 잡아 죽였다. 왕은 그 공에 따라 어의와 금대를 하사하고 그 후 성종 2년 좌집정 치리 공신의 추가를 받았다. 고려 건국 초기부터 여러 왕에게 별점의 예언으로 봉사하여 치리 공신까지 된 최지몽은 부모가 팔십노경으로 마지막 봉양을 하겠다고 사직원을 올렸으나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다시 상서하여 사직을 청했으므로 왕은 마침내 "그럼 조기 출근을 면제할테니 내 사방일을 자유롭게 보시오."면서 특별 대우를 분부했다.
대왕을 섬긴 시골 청년도 성종 육년에 이미 늙은 치리 공신으로 병을 얻어 마침내는 죽게 될 때 왕은 시를 보내어 위문하고 그리고 귀법사와 해인사 두 절에서 중 이천 명으로 하여금 수복을 비는 성대한 재까지 올렸다.
별박사 최지몽이 지상에서 사라지자 태사로 추증하고 경종 묘청에 배향했다.
만족도


관리담당
문화예술과 문화유산팀 박수홍   061-470-2636
갱신일자
2019년 12월 0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