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東初, 1908. 05. 25, 〈韓半島文化大觀(續)〉, 《대한학회월보》 제4호, 대한학회.
韓半島文化大觀(續) 李東初 第二章 魏晉文明의 遞傳 第一節 銳利 兵器의 傳習 韓半島文化의 本源이 西南 兩系統을 繼受야 成形엿 其 發達의 影響이 四隣에 反動지라. 於是에 魏主曹叡ㅣ 高句麗의 勢力이 漸熾을 認고 使者를 遣야 和親을 媾結세 公孫淵으로 여금 遼東太守 樂浪公을 拜엿가 其後에 公孫淵이 謀叛에 高句麗가 魏將軍 司馬懿를 助勢야 公孫淵을 討滅다. 自是로 七八載星霜을 經야 高句麗東川王 二十年에 魏將毋丘儉이 大兵을 帥고 高句麗에 八寇야 全半島을 聳動니<47>此時에 魏兵의 携來 文物이 半島에 曾有치 못 바라 弓槍刀矢의 銳利 아니라 其他 文明의 大光焰이 閃輝지라. 故로 倣此야 兵器射擊의 術을 傳習엿고 當時 新羅 漢의 歸化人夫道爲名者를 高句麗로부터 招致야 阿飡의 位를 授고 財物藏庫의 事務를 掌케 야 書算等 術을 傳習케 고 百濟 官制를 創定야 內臣佐平, 內頭佐平, 內法佐平, 衛士佐平, 朝廷佐平, 兵官佐平의 官을 置며 品位十六階를 設며 服色制를 定며 犯贓律을 制니 高向麗, 新羅, 百濟가 相競야 文武의 術을 講究지라. 此 時代에 日本國은 朝廷으로 使者를 魏에 遣야 金帛斑布의 禮物을 贈呈여스 그러 其 人民은 直接으로 文明의 光焰을 目擊티 못야 闇黑이 無類라 故로 半島文明에 風靡바ㅣ 되다. 第二節 韓半島文化轉傳于日本 池水가 盈科 後에 他川에 放流은 物理의 所使오 名花가 滿開 時에 傍樹가 生色은 物情의 所然이라 韓半島에 數十年間 蓄積薰熟 魏晋文化의 餘澤餘光이 百濟王子 阿直岐를 依由야 東으로 日本에 轉傳야 異彩의 光輝를 放다. 阿直岐 經典을 精通며 智慮가 遠大 偉人이라 日本應仁天皇이 其 太子 蒐道稚郎子의 太師를 삼아 經學을 始授케 고 其後에 阿直岐가 秀士 王仁을 擧薦예 仁이 悅服고 半島文化을 東海島에 廣布기 爲야 日本에 渡航야 論語 十卷과 千字文 一卷을 菟道稚郎子의게 獻야 菟道稚郞子ㅣ 크게 感悅야 王仁을 師禮로 款待고 仍就야 經傳을 受니 是實日本에 儒學傳播의 濫觴이러라. 爾後에 高句麗使節를 日本에 派遣할세 其 表文의 禮를 欠엿더니<48>應仁天皇의 太子 菟道稚郎子 經學을 受 故로 表文의 欠禮를 知지라 怒而不受고 使節을 放還 後에 其 群臣을 命야 百濟에 來朝고 博學士의게 經史를 學니 自是로 日本文學이 漸開고 同時에 物質的 文明도 傳移다. 新羅昔解訖王 二十一年에 비로서 碧骨池를 開鑿야 灌漑에 供니 建築의 術도 大槪 發達지라. 故로 日本이 新羅의 技師를 聘請야 茨田의 堤防을 築며 橋梁은 始架다. 此 不是라 年年歲歲에 日本朝廷은 人士를 派來야 政冶上 關係를 見習며 指導은 受엿스니 此로 由야 觀건 當時 韓半島威嚴의 隆盛엿든 거슬 可히 想像 바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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