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인박사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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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지방행정공제회, 1997, 《이달의 문화인물 ; 일본에 유학과 한문을 전파하고 한국문화를 전한 왕인》.

편저자 :   |   번역자 :   |   유형 : 기타   |   쪽수 : 2 (140-141)   |   총권수 : 권
대한지방행정공제회, 1997, 《이달의 문화인물 ; 일본에 유학과 한문을 전파하고 한국문화를 전한 왕인》. 이미지 1대한지방행정공제회, 1997, 《이달의 문화인물 ; 일본에 유학과 한문을 전파하고 한국문화를 전한 왕인》. 이미지 2

일본에 유학과 한문을 전파하고 한국문화를 전한 王仁 왕인(王仁, 생몰년 미상) 선생은 일본에 유학 및 한문과 우리나라 문화를 전한 백제때의 학자로서 일본 오진왕(應神王)의 요청으로 『논어』 10권, 『천자문』 1권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가 태자 우찌노와까이라츠고(兎道稚郞子)의 스승이 되었다. 또한 경서에 통달하여 일본 왕의 요청에 의해 군신들에게 경사(經史)를 가르쳤고, 그의 자손들은 가와치(河內)에 살면서 기록을 맡은 사(史)가 되었으며, 일본조정에 봉사하여 일본고대문화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후 일본에서 선생은 아쓰카문화의 시조 또는 일본학문의 시조로 숭앙을 받았고, 그의 위대한 덕을 기리는 묘, 석비, 신사 등을 세워 놓아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왕인선생이 일본으로 건너간 연대에 대하여 일본의 역사책 『고지기(古事記)』에 의하면 오진천황대(應神皇代)라 하고 백제의 근초고왕때라 하였으며, 『니혼쇼기(日本書記)』에는 오진천황( 天皇) 16년 2월에 왔다고 기록 되어있다. 이렇듯 왕인은 일찍이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일생을 보냈기 때문에 고향인 전라남도 영암군에는 태어난 집터를 중심한 어릴때 공부하던 자리와 일본으로 떠날때의 배 떠난 포구등 약간의 유적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일본에는 이곳저곳에 학문을 펴고 학문의 조상으로서 숭배를 받았던 때의 여러 유적지, 그후 그의 자손들이 일본 역사에 남긴 위대한 업적지 등 많은 역사의 현장이 남아있다. 전라남도 영암군에는 왕인석상을 비롯하여 왕인이 독서하였다는 왕인책굴 등이 있으며, 무덤은 일본 오사까(大阪)와 교또(京都)의 중간지점인 히라가다(枚方)에 있다. 한국에는 고대의 관계기록이 없으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몇가지 문헌에 영암군 군서면 구림리 지역의 왕인박사 사적에 관한 내용이 보이며 현재 이곳에는 구전되는 왕인박사에 관한 역사와 그 유적이 여러곳에 남아있다. 현지에서는 영암군 당국은 물론 「왕인박사현창협회」 등 여러 모음에서 그동안 국내회의 왕인박사 관계서적을 조사하여 많은 논문과 저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일본에서도 왕인박사 묘소 등 관계서적을 보호하는 모임이 있어 여러 권의 논저를 출간하고 있다. 오늘날 일본에 남아있는 왕인박사 관련 사적은 한국보다 훨씬 더 많다. 그것은 젊은 나이의 왕인이 일본에 건너가 그곳에서 생애를 마칠 때까지 일생동안 학문에 대한 그의 정열과 가지고 있던 학자로서의 모든 거승ㄹ 바쳤기 때문에 당연한 일로 생각된다. 그리고 왕인박사 이후에도 그의 많은 자손이 각처에 퍼져 일본에 문화를 깨우쳐 주었으며 특히 아쓰카문화 형성의 원조가 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사적은 각처의 문화지역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왕인박사가 이룩한 공적은 실로 위대하다 할 것이다. 오늘날 국제화․세계화시대를 지향하고 있는 이때 1500년이전에 왕인박사는 몸소 국제화․세계화를 실천하였던 것이다.<자료:문화체육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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