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인박사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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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림습엽(鷄林拾葉)

편저자 : 하나와 호키이치(塙 保己一)   |   번역자 :   |   유형 : 기타( 역사서 )   |   쪽수 : 2   |   총권수 : 3권
계림습엽(鷄林拾葉) 이미지 1

한반도와 관련된 기록을 모아놓은 가운데 왕인 관련 기록을 정리해 놓은 것이다. 16년 2월 왕인이 오니, 우지노아키이라쓰코가 스승으로 섬겼다. 여러 전적들을 왕인에게 익혀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른바 왕인이라는 이는 서수(書首) 등의 시조이다. 『고어습유』에, “가루시마 도요아키라(輕嶋豐明 : 應神天皇)의 조정에 이르러 백제 왕이 박사 왕인을 바쳤으니 고우치노 후미노오비토(河内文首)의 시조이다. 하다노키미(秦公)의 선조인 궁월(弓月)이 120현의 백성을 이끌고 귀화하였다. 아야노아타이(漢直)의 선조 아지사주(阿知使主)가 17현의 백성을 이끌고 조공하러 왔다. 진, 한, 백제의 귀화한 백성은 각기 수만 계획으로 포상하기에 충분하다. 모두 사당을 가지고 있으나 미처 폐백을 준비하는 예가 없었다.”라고 하였다. 『속일본기』에, “연력 10년 4월 무술일 사다이시(좌대사) 정6위상 후미노 이미키 모오토(文忌寸最弟), 하리마 쓰쿠나메(播磨少目) 정 8위상 다케후노 무라지마카니(武生連眞象) 등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후미노이미키 등은 원래 두 개의 가문이 있어 동문(東文)은 직(直)이라 칭하고 서문(西文)은 수(首)라 부릅니다. 서로 나란히 일을 하여 그 유래가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동문은 온 가문이 이미 스쿠네(宿禰 : 세 번째 성)에 올랐으나 서문은 은혜를 입지 못하여 여전히 이미키(忌寸 : 네 번째 성)에 머물러 있습니다. 모오토 등이 다행이 밝은 시대를 만났으나 자세한 살핌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여러 세대를 거치고 나면 이치를 펼 길이 없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똑같이 영예로운 성씨를 내려주어 영원히 후손에게 계책을 남기게 하십시오.” 칙서를 내려 그 본계를 물으니 모오토 등이, “한고제의 후손을 난(鸞)이라고 하였는데 난의 후손 왕구(王狗)가 백제로 옮겨왔습니다. 백제 구소왕(久素王)이 성조에서 사신을 보내어 문인을 초청하니, 구소왕이 곧 왕구의 손자인 왕인을 바쳤습니다. 바로 후미노와 다케후노의 선조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모오토 및 무라지마카니에게 스쿠네 성을 내렸다.”라고 하였다. 『신찬성씨록』에, “좌경제번(左京諸蕃). 후미노 스쿠네(文宿禰). 한나라 고황제의 후손 난왕에게서 나왔다. 후미노 이미키(文忌寸). 후미노 스쿠네와 조상이 같다. 우니코노오비토(宇爾古首)의 후손이다. 다케후노 쓰쿠네(武生宿禰). 조상이 같다. 왕인의 손자 아랑고수(阿浪古首)의 후손이다. 桜野首. 위와 같다. 우경제번(右京諸蕃). 栗栖首. 후미노 스쿠네와 조상이 같다. 왕인의 후손이다. 하내국제번(河内國諸蕃). 古志連. 후미노 스쿠네와 조상이 같다. 왕인의 후손이다.”라고 하였다. 

十六年二月 王仁來之 則太子菟道稚郎子師之 習諸典籍於王仁 莫不通達 所謂王仁者 是書首等之始祖也 古語拾遺云 至於輕嶋豐明朝 百濟王貢博士王仁 是河内文首始祖也 秦公祖弓月 率百廿縣民而歸化矣 漢直祖阿知使主 率十七縣民而來朝焉 秦漢百濟内附之民 各以萬計 足可褒賞 皆有其祠 未預幣例也 續日本記云 延曆十年四月戊戌 左大史正六位上文忌寸最弟 播磨少目正八位上武生連眞象等言 文忌寸等元有二家 東文稱直 西文號首 相比行事 其來遠焉 今東文擧家旣登宿禰 西文漏恩猶沈忌寸 最弟等幸逢明時 不蒙曲察 歷代之後申理無由 伏望 同賜榮號 永貽孫謀 有勅責其本系 最弟等言 漢高帝之後曰鸞 鸞之後王狗轉至百濟 百濟久素王時 聖朝遣使 徵召文人 久素王卽以狗孫王仁貢焉 是文 武生等之祖也 於是最弟及眞象等八人賜姓宿禰 新撰姓氏錄云 左京諸蕃 文宿禰 出自漢高皇帝之後鸞王也 文忌寸 文宿禰同祖 宇爾古首之後也 武生宿禰 同祖 王仁孫阿浪古首之後也 櫻野首 右京諸蕃上 栗栖首 文宿禰同祖 王仁之後也 河内國諸蕃 古志連 文宿禰同祖 王仁之後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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